사립 성카틀레야 유치원 - 6점
야부 케이스케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사립 성 카틀레야 유치원 1권
- 어른의 유치원, 이미 어른이야?

  <사립 성 카틀레야 유치원(이하 카틀레야)>의 스토리가 다른 유치원 소재의 작품에 비해 부드럽게 진행되는 것은 <카틀레야>의 아이들이 굳이 어른을 모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이’와 ‘어른’이라는 뻔한 대립 혹은 모방의 구도가 여기서는 생략되어 있는데, 아이들은 미숙한 이해나 성장에 대한 욕구를 표출하기보다는 어른의 시선 자체로 세상을 보고 있다.
  이미 ‘어른’인 어른에 비해 아직 어른이 아닌 어른은 자유롭다. 그렇기에 아이는 어른의 문법을 이해하면서도 은근히 놀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부모의 역할이나 경제력, 가정의 화목함 등과 관계없이 대부분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두는데 이를 유치원생의 범주에 넣고 생각하기엔 너무 정신적인 자립도가 높은 것이다.
  <카틀레야>에는 교사가 아이들을 훈육하는 장면은 잘 나오지 않는다. 이는 작품의 초점이 주로 아이들에 맞춰져 있는 점에서도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데, 억지로 ‘가르침’을 삽입할 필요가 없는건 아이들 스스로 세상의 룰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데, 그런 문법을 가지고 놀거나(아카네 토코), 그냥 내버려두거나(야마사키), 한눈을 팔고 있다(쿠로다). 세상을 설명하려 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동화되어 있는 것이다.
  어른인 교사 세 명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독자의 시선으로 볼 때 그다지 유리되어 있진 않다. 차라리 그것은 여고생이 좋았지만 내려오다 보니 유치원이었기(쿠로다) 때문이며, 본업보다는 밤의 일이 수입이 더 많기 때문이고(아카네 토코), 아들보다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기(야마사키)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좀처럼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이 이 만화의 장점이다.
  전체적으로 네컷만화의 구성을 따르고 있으며 중간중간 에피소드 단편이 들어가기도 한다. 유치원스럽지는 않다는 점에서 능글느끼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렇게 썼음에도 ‘역시 애들’이다 싶은 부분도 있고 일방적인 호감에 바보 같은 캐릭터로 변해가는 남선생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단순해서 뻔한 구도보다는 흥미로운 어른 유치원생 이야기에 끌린다면 추천.

하나마루 유치원 1 - 6점
Yuto 지음/서울문화사(만화)
  하나마루 유치원 1권
  - 어른의 유치원, 어른이 되고 싶어

  유치원에서 벌어지는 사랑의 쟁탈전이라고 할까. 남교사를 좋아하는 아이와 동료 여교사를 좋아하는 남교사. 유치원을 소재로 하는 다른 작품 <성 카틀레야 유치원>에 비교하면 상당히 간단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작품의 진행도 분명한 대비를 가지고 있는데, 성인 남성으로부터 관심/애정을 얻고자 하는 여성 아동과, 성인 여성 동료로부터 관심/애정을 얻고자 하는 성인 남성의 두 축이다. 이것은 계층이라기보다는 물고 물리는 고리를 형성하며 느긋하고 안정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하는데, 작가가 소아성애자를 그리지 않는 이상 성인과 아동의 정서적 친밀감은 성인의 에로스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를 설정할 때 필연적으로 그러하듯이, 안즈는 끊임없이 성인을 모방하며 츳치를 사로잡으려 한다. 친구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일정한 성인들의 행동양태를 흉내내려 애쓰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데 이것이 귀여움을 자아낸다. 성인과 같은 모습이 되면 사랑을 얻을 수 있을거라는 욕망은 한번 꿈으로 분출되는데 이것이 프로이트식 작동 방식을 끼워넣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꿈에서도 아동의 심리는 일관성을 띠고 유지되며 독자는 여전히 느긋함을 가지고 관찰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유치원 또한 교육기관 중 하나다. 등장하는 성인 교사 두 명 역시 아이들을 훈육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며, 큰 장애 없이 이를 수행해나간다. 아동이 비록 성인을 모방하며 에로스를 꿈꿀지라도, 교사가 보여주는 관심과 애정의 수준이 일정 이상에 도달하면 그것을 ‘달성했다’고 믿는 것이다.
  구도가 너무 간단하면 변수나 긴장감이 사라진다는 방향으로 탄탄해지는데, 아이들의 성인 모방으로 벌어지는 짤막짤막한 에피소드들에 만족한다면 구입을 그리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스토리 자체로 보면 아직 극화를 이루기 위해 많은 부분이 전개되어야 한다. 그림체도 그렇지만 등장하는 유치원 아이들은 충분히 귀엽다. 비교할만한 작품인 <성 카틀레야 유치원>의 능글느끼함이 싫다면 시도해 볼 만한 작품이긴 하다.

파천황유희 II

2008/08/07 23:10
파천황유희 2 - 6점
엔도 미나리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자신감으로 가득할수록 좌절을 맛보는 아픔도 클까. 엔간한 실력은 갖춘 마법사 같지만, 라젤은 이번 권에서 꽤 울게 되는 것 같다.
  동료의 과거를 알고 싶고, 동료의 신뢰를 얻고 싶고, 도와주고 싶은 사람을 구하고 싶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이유를 찾아내고 싶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진행되는 것은 사건일 뿐, 인물들의 과거를 조금씩 암시해주기는 하지만 이번 편에서 드러나진 않는다. 보이는 것은 흑막과 상처와 아픔이다. 그래도 라젤의 상태는 1권보다는 더 안정기에 돌입한 듯하다.
  이런 우울할 법한 스토리에도, 라젤의 걱정없는 유쾌함이 남아있는게 물론 이 작품의 특징이다. 이것이 성장물인가, 그것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유희'를 끝까지 실천하고 있는 라젤의 앞으로가 기대된달까.

파천황유희 I : 귀여운 허세의 매력

2008/08/07 23:02
파천황유희 1 - 8점
엔도 미나리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세상을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깨닫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 대답이야 어쨌든 라젤은 아버지 덕에 그 순간을 일찍 체험하게 된 것만은 틀림없다. 소파에 편히 앉아 눈을 반짝이던 딸에 속이 불편해서인지도 모르지만, 경험을 쌓으라는 짤막한 말과 함께 제법 얄팍하게 문 밖으로 던져진 신세다.
  그래서 삽시간에 집과 가족을 잃은 소녀는 훌쩍거리며 성냥을 팔다가 눈더미 위에 쓰러지…는 게 아니라, 끝내주게 쿨한 열네살의 미소녀 라젤이다. 감정이 지나치게 많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나이의 라젤인 것이다. 모든걸 치기와 허세로 치부하기엔 여러분의 라젤은 꽤나 귀여울 정도다.
  이 작품은 성장물인가. 일단은 그런 요소도 있다고 해두는 편이 좋겠다. 혼자가 된 라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동행을 찾는 일, 가장 먼저 배우는 일은 동료를 만드는 일, 자존심을 버리는 것도 제법 괜찮다는 걸 깨닫는 일.
  감정이 많고 사건이 짧지만 빠르게 흘러가는 점이 단점이지만, 짤막짤막한 개그 타이밍이 작품의 백미다. 그리고 대책 없이도 어떻게든 될거라는 미소를 보여주는 라젤의 매력이 이 작품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망상소녀 오타쿠걸 1권

2008/08/03 23:59
망상소녀 오타쿠걸 1 - 6점
나츠미 콘조 지음/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이 책의 띠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야오녀의 눈으로 사랑을 하고 있어요♡ 야오녀들의 필독서!!]

  그런데 모 지인의 협찬으로 읽게 된 저의 소감으론, 이 문구는 작품을 요약하는데 별로 쓸모있는 도구가 아닙니다. 뒷면에 써둔 [남자 오타쿠들의 리얼 스토리가 <현시연>이라면, 여자 오타쿠들의 리얼 스토리는 바로 이것!!]이라는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작품은 야오녀의 눈으로 '사랑'을 하고 있지 않으며 야오녀들의 '필독서' 또한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쓸데없는데 태클을 거는게 제 장점입니다)

  작품은 제법 재미있었습니다. '남의 망상을 보고 깔깔거릴 수 있다'는건 유쾌한 일이라서요. 망상의 주된 내용은 부녀자들의 커플링 현실 적용입니다. 누구와 누구는 커플링하면 참 재미있겠다 어울리지 않니? 누가 수일까? 뭐 이런 것 말이죠. (클래스메이트를 썩은 눈으로 바라보지 말자는 누구의 충고는 무시합시다)
  주목해야 할 점은 내용은 부녀자스러울지언정, 작품이 구현하고 있는 구도는 친구 부녀자들을 관찰하는 입장의 남학생 주인공의 시점에서 그려진다는 것이죠. 시점이 뒤바뀌면서 관찰을 하는 대상이 다시 독자로 하여금 관찰을 당하는 이중 구조를 만들었는데요.
  여기서 다시 상기해야 할 점은 이런 구조는 부녀자의 시점으로 세상을 구성해서 보여주는게 아니라, 그걸 관찰해나가고 이해하려고 하는 남성의 시선을 보여주기에 알맞은 틀이라는 것. 망상의 내용도 가지가지지만 그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배리에이션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적당히 가벼운데, 물론 야오이가 소재인 야오이 만화에 너무 많은걸 바라면 안되겠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소재만 빼곤 딱히 여성향도 아닌 이 작품이 야오녀들의 '필독서'가 되어야 할 이유를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홍보문구라고 해도 말이죠.

  더구나 '야오녀의 눈으로 사랑을 한다'라고 하는건 더더욱 상상하기 어렵네요. 우선 '사랑'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린 고등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이 작품에서 가장 뚜렷하게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남주인공 아베 혼자 정도일까요. 아사이는 망상의 세계에서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커플링에 지속적으로 두 남자친구들을 대입시키지만 자기가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걸 굉장히 상상하기 힘들어하죠. 1권의 마지막에서 겨우 다른 커플링을 생각해냄으로써 자신을 망상의 일부로 대치시켜놓지만 여전히 그 불안한 연상관계는 사랑이라는 직접적인 형태의 주문에는 어긋나지 않나요? 그러니까 '야오녀의 눈'으로 사랑을 한다는건 더더욱 어불성설인거죠.

  구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사이를 짝사랑하는 아베의 당황에 당황을 잇는 반응들이 그저 귀엽습니다. 노멀/여성향/남성향 가리지 않는 취향을 가진 분이라면 적절히 웃으면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동인녀들의 구미에는 그다지 맞지 않는 쪽이 아닐까합니다.

원작을 뒤집어 생각해본 그림동화

2008/07/28 01:59
원작을 뒤집어 생각해본 그림동화 - 6점
혼다 토오루 지음/창우BOOKS
  '그림 동화는 잔혹하다'라는 말이 바로 연상될 만큼 그림 동화의 이미지가 강해져 버린 오늘날이지만, 여러분!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그림 동화는 원래부터가 '동화'입니다. 아이들과 어른들을 막론하고 사랑받는 존재물입니다.
  결국, 그림 동화는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랑 이야기의 원류인 것입니다.
- 혼다 토오루, 「실은 모에한 그림동화」, 2006
머릿글에서

  지인인 S모님의 협찬을 받아 읽게 된 책. 눈길을 끄는 저자 이름에다, '튀고 별나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띠지까지. 국내에는 '원작을 뒤집어 생각해본 그림동화'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세 가지 '혼란 방법'- 즉 문헌학적 텍스트 비판과 정신분석학, 유물론을 통해 동화를 하나의 텍스트로 이해했던 「누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웠는가?」(이링 페쳐)로부터, 동화를 재구축하는 작업은 이제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재구성된 많은 숫자의 동화만큼, 다양한 시점이 있다. 전승을 통해 만들어져 내려온 동화가 텍스트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면, 이제 재구성된 동화들은 어떤 관점에서 왜 불러내어졌는가를 따져야 할 시점이다.
  그러므로 「원작을 뒤집어 생각해본 그림동화」의 '뒤집었다'는 원제가 「실은 모에한 그림동화」라는 것은 극히 명료한 답을 나타내주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은 뒤집었다기 보다도, 그림동화의 이야기들을 빌려 쓴 모에동화다. 거기다가, 비평식의 글을 덧붙이고 싶어도 저자가 각 작품들마다 스스로의 해설을 붙여놨다. 이건 반칙이다(웃음).
  때문에 이것저것 적어보려던 기백도 모든 것을 까발린 저자의 해설 앞에 움츠러들 수 밖에 없는데... 별 수 없다, 다른 방식으로 써야지.

  이러한 무자각하고 천진난만한 '선악의 카테고리'는 동화나 만화의 아동용 이야기 장치에 의해서, 어린 아이들의 가슴 속에 새겨져 버린다.
  물론, 선과 악이라는 개념을 교육하는 행위 자체는 절대적으로 빠뜨려선 안 된다. (...)
  그런데, 많은 동화나 아동용 이야기에서는, '선'과 '악'을 각각 예를 들어 '왕자님'과 '늑대'라는 캐릭터에 투영시켜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실은, 아이들을 위해서 동화를 만드는 어른 자신이 "자신은 선인이고, 다른 누군가는 악인이다."라는 거대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 이것은 '억압'과 '투영'이라는 심리 규제에 의해서 생겨나는 오류이다. (...) 그림 동화를 재해석하면서 깨달은 것은, 이러한 "투영에 의한 악이 외부에 있다는 문제와 인간의 계층화이다."
- 혼다 토오루, 앞의 책, 후기에서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할 것까지도 없이, 굳이 이 책에서 재구성의 메세지를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위의 작가 후기 부분으로 대체로 충분하다. 저자는 동화에 의해 부여된 고정적인 선악의 투영에 혼란을 주고 싶었으며, 선인과 악인의 이분적인 잣대와 계급화를 학습시키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다인 것 같다. 이 책은 '모에'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품에 해설까지 넣는 반칙을 구사하고 있기에 감추어지지만, 작품만을 읽었을 때 이건 위트가 보일 뿐인 모에 스토리다. 해설에 서술하고 있는 내용 중에 자본주의나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 등이 들어가 있는 척 하지만 그걸 해설 없이 읽어내길 바란다면 저자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냉정히 말하면 작품에서 읽어내기 어렵기에 굳이 해설로 첨언을 했다고 할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모에 스토리면 어떤가. 기대하지 않았다면 여러 대목에서 피식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는 있다. 다만 해설이 없다면 재구성이 아니라 패러디에 불과하지 않을까라고 평가해야 할 정도라, 이 책을 다룬 몇 포스트들에서 '오타쿠 옹호용'이란 딱지가 붙은 것도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나 스스로도 '오타쿠'라는 딱지를 아무렇게나 붙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표현은 하지 않기로 하겠다. 이 책은 그림동화의 몇 스토리들에 '모에'스러운 각색을 시도한 작품집이다. 그런 다음의 결론이 '여동생은 모에하지 않은가!' '옛 얘기에도 츤데레(저자식 표현으로는 츤데레)가 있지 않은가!' '성역할이 바뀌어도 역시 모에란건 좋은게 아닌가!'라는건데. 이게 얼마만큼의 결론이 되겠는가? 뭐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그 정도일 뿐이다.
 
  그래도 '동화 재구성 읽기'라는 맥락 속에 이 책을 집어넣을 때, 저자가 '모에'에만 너무 주목한 나머지 스스로 사랑 이야기를 쓴다고 해놓고 그 본질에 대해 별 탐구나 언급 없이 모에를 적용한 부작용이,
  "예쁘면 다 통한다."라고 하는 진리는 역시 세계 각국, 시대를 막론하고 다 통한다 생각되어 집니다.
- 앞의 책, p. 42
  결국 여자를 사랑의 대상으로써 우러러 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 먹이로써 취급하는 타입의 남자도 존재합니다. (...) 유감스럽게도, 많은 여자들은 이러한 남자를 좋아합니다.
- 앞의 책, p. 60
  이처럼, 내 나름대로 그럴 듯한 억지 이론들을 늘여 좋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여동생은 강하다, 여동생은 예쁘다!!" 동생을 사랑하는게 뭐가 나빠!!
- 앞의 책, p. 236
  처럼 나타나버린다. 굳이 여기다 페미니즘을 들이대서 글을 길게 만들고 싶진 않지만. 작가가 동화를 재구성해봤다는 계기로 '선악의 투영'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고 있는 걸 들어보면, 누군가 [왜 당신은 동화에 모에를 투영했는가? 모에가 아닌 사랑 이야기는 없지 않나?] 라고 물었을 때 작가는 불행히도 "내가 좋아서 그랬다, 모에, 좋지 않은가? 여동생은 역시 모에하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은 모에한 그림동화」라는 제목을 「원작을 뒤집어 생각해본 그림동화」라 낸 건 솔직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모에'라는 말을 번역하기 곤란할지 모르지만, 모에가 모에지 뭐겠는가.

덧 | 문장의 번역 완성도는, 안 좋습니다. [...] 인용문에도 그대로 보이기에 한마디 해둡니다.

기후와 작물, 사회 2

2008/07/23 00:24
  이 새로운 유형의 변화는 어떤 식으로 나타날 것인가? 한 가지 입장은 에너지 기업들이 내세우는 견해인데 지구 온난화에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점진적인 기후 변화는 보다 자비로운 기온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해수면이 약간 올라가고 얼마간의 극단적인 기후 사건이 일어나겠지만 몇 세기 안에 지구는 보다 단일화되고 보다 따듯한 기후를 누리게 되어 얼음 두께가 얇아지고 겨울이 온화해지며 보다 예측 가능한 기후로 바뀌어 그 옛날 공룡 시대의 기후를 닮아갈 것이며 그래서 인간은 고대의 기후 변화에도 적응했듯이 별 노력 없이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 브라이언 페이건, "기후는 역사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2000, pp. 341~342

  그러나 역사의 기록은 이것이 환상일 뿐임을 보여준다. 기후 변화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돌연한 것이며 10년 또는 년 단위 이내의 기간 중에 급격하게 일어나는 변덕스러운 것이다. 소빙하기는 그 급격한 기후 변화로 유명하다. 수십 년 동안 안정적이던 기후가 갑작스럽게 추운 날씨로 변해버렸다. 지난 17세기 말이나 1740~1741년이 그 예다. 기후 변화의 돌연성이라는 패턴은 1만 5천 년 이전의 빙하시대까지, 아니 어쩌면 지질시대의 시초까지로 거슬러올라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역사를 안다면 갑작스런 기후 변화가 일률적으로 온난화되는 추세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식의 경솔한 주장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을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소빙하기는 우리로 하여금 기후 변화란 불가피한 것, 예측 불가능한 것 그리고 때때로 지독하게 심술궂은 것임을 깨닫게 한다. 미래의 기후 변화 역시 그 규모가 국지적이든 범지구적이든 난폭할 것이다.
- 브라이언 페이건, 앞의 책, p. 342

기후와 작물, 사회

2008/07/22 23:58
  이런 기후 조건은 북유럽 거의 전체가 비슷했지만 아일랜드는 습도가 높은 것이 감자에 특히 적합했다. (...) 요리하기도 쉽고 저장도 쉬워서 감자는 아일랜드 빈곤층에게는 안성맞춤인 식품이었다. 이래서 감자는 자연스럽게 효과적인 구황식품으로 등장했다. 감자와 곡물의 조합은 곡물 농사가 흉작이 되더라도 안전판이 되었다. 감자와 곡물 간의 균형이 유지되는 한 아일랜드는 굶주림에 대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한 셈이었다.
- 브라이언 페이건, "기후는 역사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2000, p. 297

  아일랜드의 감자 재배는 그 뒤 반세기 동안 20배로 늘어났다. 물론 '학살의 해(Blaidhain an air)'라고 불리게 된 1740~1741년은 예외였다. 그 해에 유례 없는 혹한이 몰려와 곡물과 감자 그리고 가축, 심지어는 바닷새들까지 얼어죽었다. (...) 30 내지 40만 명이 이질, 굶주림, 티푸스로 인해 죽었다. 결국 아일랜드인의 10퍼센트 정도가 1740~1741년 당시의 기근과 그에 따른 질병으로 죽은 것이다. 이 때의 기근은 감자도 귀리도 아일랜드 농업의 완벽한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비가 잦은 기후에서는 감자의 저장 기간이 최장 8개월을 넘기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 브라이언 페이건, 앞의 책, pp. 298~299

  날씨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성을 망각한 채 아일랜드는 단품종 경작이라는 위험천만한 농업으로 옮아갔다. (...) 감자의 공급에 차질이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된 영국은 본토 북동부의 리버풀과 맨체스터 지방의 급격한 산업화로 늘어난 인구를 먹이기 위해 아일랜드의 감자를 수입했다.
- 브라이언 페이건, 앞의 책, p. 300

  감자는 식량 부족에 대한 충분한 보험이 아니었다. '여름이 없던 해'인 1816년에 6만 5천명이 굶주림과 그에 연관된 병으로 죽었다. 그들이 죽은 부분적인 원인은 영국 당국자가 과거처럼 곡물 수출을 금지하지 않은 데 있다. 총무대신 로버트 필은 국가가 기근 구제에 중심적 역할을 하고 나서면 개인 자선가들이 구휼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므로 국가가 적극성을 띠지 않겠다고 억지 핑계를 댔다. 1817년 6월 그는, "생활 수준이 높은 자들은 가족 식탁에 감자를 올리지 말 것이며 말에게 먹이는 귀리의 양을 줄이라"는 얼빠진 지침을 내렸다.
- 브라이언 페이건, 앞의 책, p. 303

  로버트 필은 아일랜드 통치에 상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아일랜드의 문제들은 사회적 후진성에 기인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미국에서 값싸게 들여오는 옥수수로 아일랜드의 식생활에서 감자를 영원히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시골의 빈민들을 부농의 땅에서 일하고 품삯을 받는 임금노동자로 만들려 했다. 그는, 자유무역이 이루어지고 고도의 과학적 농업에 점점 더 많은 투자를 하여 사회가 재조직되기만 하면 아일랜드의 농업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 피터 그레이, "아일랜드 대기근", 1995, p. 39

  1845년 아일랜드 전체의 감자 손실률은 약 40퍼센트, 그러니 기근의 위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 위원회는 원인 규명에는 실패했지만 필에게 미국으로부터 10만 파운드 상당의 옥수수를 즉시 수입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필은 굶어 죽어가는 감자 농민을 구제하기 위한 식량으로서가 아니라 정부가 곡물 시장에 관여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곡물 가격을 낮게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조치를 취했다. (...)
  1846년 4월, 하원은 농부들이 씨감자를 먹어치우고 있음을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 8월 초에 들어서자 동고병이 작년보다 딱 두 달 앞서서 다시 찾아왔다. (...)
  1846년은 흉작으로 인해 전 유럽이 식량 부족에 빠진 해였다. 그래서 각국은 지중해와 북아메리카로부터 수입하는 식량 화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높은 값을 치르고 대부분의 식량을 차지했다. 영국은 여기서 밀려나고 따라서 아일랜드의 기아 구제에 차질이 생겼다. (...) 그러면서 정부는 굶주리는 그 지방에서 곡식이 반출되는 것을 금지하지도 않았다. (...) 10월이 되자 날씨가 추워졌다. 11월에는 타이론 지방에 15센티미터의 눈이 니렸다. (...) 그해 11월, 28만 5천 명이 보잘 것 없는 품삯을 받고 구제기관이 실시하는 근로사업에 나갔다. 많은 수가 일하다 죽었다. (...)
  빛나는 여름과 병 없는 수확에도 불구하고 기근은 1847년에도 계속되었다. (...) 1848년 (...) 7월 들어 냉랭해지면서 비가 자주 내렸다. 그러자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동고병이 발생했다. 8월이 되자 비가 더 많이 내려 밀과 귀리 농사를 망치는 새로운 재앙이 추가되었다. 1848년의 감자 흉작은 처참했던 1846년에 필적했다. (...)
- 브라이언 페이건, 앞의 책, pp. 307~316

  "거대한 이민의 물결이 끊임없이 서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다수 이민자들은 아일랜드의 농민과 날품팔이 인부들로, 신대륙에서 운명을 개척하고자 구대륙을 떠난 다섯 사람 중 최소한 네 명이 아일랜드계로 추산된다. 감자 기근과 콜레레가 만연하여 비참한 나날이 이어졌고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수는 갈수록 늘고 있다. 그 숫자가 너무나 엄청나 아일랜드 인구의 점진적 감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킬 정도이며, 그런 예상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850년 7월 6일
- 피터 그레이, 앞의 책

  이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 극도로 예측 불능했던 기후와 단일 작물에 지나치게 의존한 점과 정부 차원의 무관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유럽의 한 귀퉁이 고립된 섬에서 적어도 1백만이 넘는 인구가 죽었다. (...)
  아일랜드의 인구는 나머지 19세기 기간 동안 줄곧 줄어들었다. 이민은 1854년에 최고조에 달했다. 1860년대에도 매년 9만 명 꼴로 이민을 떠났다. 이것은 1870년대 와서 이탈리아 이민이 급증하기까지 유럽 어느 나라보다 높은 이민자 수였다. 1900년에 이르자 아일랜드의 인구는 대기근 이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는 유럽 여러 나라 중 아일랜드에만 있었던 독특한 현상이다. 아일랜드의 인구 감소 추세는 1960년대에 와서야 겨우 반전되었다.  (...)
  아일랜드의 대기근은 유럽의 마지막 기근이 아니었다. (...) 그러나 수치스럽기로는 아일랜드의 기근을 따를 기근이 없다.
- 브라이언 페이건, 앞의 책, pp. 315~316

카시마시 1권을 보았습니다

2008/03/20 00:23
카시마시 1 - 6점
아카호리 사토루 지음/학산문화사(만화)
  [ 이하의 내용은 스포일러/네타바레/미리니름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를 요합니다 ]

  지난 주 서울 모처의 서점에 놀러갔다가 S모님의 권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걸 사시는거예요!"
  제 손에는 카시마시 코믹스 1권이 들려있었습니다.
  '답례로 읽고 나면 포스팅을 하도록 할게요'라고 했으므로... 좀 늦었지만,

  써볼까 합니다.

  카시마시는 타겟을 명확히 설정한(노리고 들어온) 백합물입니다. 주인공인 하즈무는 소년이었지만 외계인과의 딥 키스로 소녀가 되었다... 라는 전개입니다만 남성일 때의 스토리를 등장 유무에 관계없이 계산해봐도 20페이지 밖에 안 됩니다.
  즉 외형상으로는 두 명의 친구 야스나, 토마리와 함께 세 명의 소녀가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는 girl meets girl이라는 부제에서도 드러납니다)

  캐릭터의 성별이 바뀐 작품을 '바뀌었다'라는 점에서 주목한다면 성 변환(성전환이라 쓰지 않음을 유의)이 단순한 설정에 불과한지 혹은 작품의 주제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를 볼 수 있겠지요. 그로부터 이야기의 전개에 성 변환이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건져낼 수 있을겁니다.
 
  우주선과의 사고가 하즈무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화시키고 모든 전개의 시발점으로 작용하는 극적 장치인 것은 분명합니다. 작가가 여자를 그리는게 좋아서라든가 남자 주인공에게 여자를 한 명 더 붙여 할렘을 완성시키려는 식의 의도는 아닌, 설정상의 중요한 도구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 변환에는 커다란 개연성이 보이지 않고, 주변인은 물론 하즈무 본인도 성 변환에 대한 정체성의 괴리감을 그다지 보여주지 않습니다. 다소 놀랍긴 하지만 그저 주어진 운명과도 같고, 받아들이고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쪽이지요. 주목받는 것은 단지 인물들 사이의 관계뿐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처음부터 '여성'인 하즈무를 상정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시마시를 트랜스물로 분류하는 것은 다소 위화감이 있습니다. 성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대한 고민이나 인물의 유형 변화도 없다시피한 작품에 말이죠. 개인의 자각이나 능동적인 행위로서의 성전환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갑자기 주어진, 수동적인 성 변환이 어울리는 경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 변환은 작품의 장르를 일변하지 않으며(처음부터 백합이므로) 취향에 국한한 코드를 부여할 뿐입니다.

  이 작품을 남성향 백합 판타지로 규정하면, 카시마시는 보기 거북하지 않은 설정 필터를 하나 추가한 셈입니다. 가령 하즈무를 한 때 남성이었던 인물로 계속 인식하고 있으면 여고생 간의 연애 감정이 불편하지 않게 비칠 수도 있습니다. 백합 코드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면죄부가 될 수 있겠지요. 같은 이유로 남자인 친구 아스타는 중간중간 등장하여 하즈무의 과거를 일깨우지만 곧바로 무시되어 버립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하즈무의 성 변환이 작품의 특이 요소이며 주된 이야깃거리지만, 여성인 하즈무에게는 오히려 남성이었을 때의 자신/자신의 기억이 충격과도 같은 것입니다. 아까의 말을 빌리자면 외부의 충격이라 할까요. 카시마시 1권은 남성을 잊으려 하는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구성할까요 ─ 여성이고자 했던 하즈무는 우주선 충돌 전에 야스나에게 고백한 일이 풀리지 않자 울상을 짓고 있습니다. 소원을 중얼거리는 도중 사고가 발생하고, 성 변환이 이루어진 뒤 처음 맞이하는 얼굴샷에서 하즈무는 미소를 띠고 있지요. 소망이 이루어진 겁니다. 여자아이의 옷을 입고, 여자아이의 행동거지를 하고, 여자아이의 속옷을 마련합니다.
  다만 아직 어찌할 수 없는 것은 남성으로서의 자의식.
 
  우주선의 충돌은 남성 하즈무라는 과거를 부여해주었습니다. 하즈무가 '이제는 여자니까'라고 미소지으며 여자아이를 학습해나가는 건 여자아이가 될 수 없었던 남성이었다는 과거에 대한 반추. 야스나가 하즈무에게 고백해오자 처음에 '이제는 여자니까'라며 달려나갔던건 '과거엔 남자였으니까'라는 인식. 여고생의 모습이지만, 자신을 칭하는 僕(ぼく)라는 대명사는 여전히 남성어입니다. (이것 또한 남성향 판타지로서 남성 독자가 하즈무에 자신을 대입하며 읽기에 편리한 설정을 만들기도 합니다만)

  하즈무는 같은 여성에게 보살핌을 받고(토마리), 남성이 배제된 시각으로부터 존재를 인식당하면서(야스나) 점차 여성이 되어갑니다. 권말의 야스나의 키스는 남성이었던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성을 잊으면서 비로소 백합 삼각관계가 완성되기도 하지요.

  개인적으로 흥미있는 설정이긴 하지만, 좋다고 평가할 정도의 작품은 아니네요. 개그나 서비스컷들이 조금 즐겁지 아니한 것도 아니지만 [...] 어중간한 장치나 구도, 남성성을 간직한 채 의문으로 꺼내지도 않으면서 곧바로 삼각관계로 뛰어넘어가버리는 설정은 저를 미묘하게 불편하게 만듭니다.

  추가로, 장 푸우의 オネニーサマ가 오랍언니라고 제법 근사하게 번역되었다가 정식 번역판에는 언빠님이 된 것은 아쉽군요. 어차피 두 단어의 합성어라고 보면, 시간순으로 보았을 때도 남성->여성이고 현재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언니 쪽이 ~빠님인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